십자가와 공급망 관리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
“죽는 게 아니야. 영광스럽게 순교하는 거지. 천국으로 가는 직행 표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공포에 떨던 병사에 눈에 안정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오른쪽에는 갤리선(노를 주로 쓰고 돛을 보조적으로 쓰는 군용선)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할 든든한 존재였지요.

SUPPLY CHAIN

십자가에 묶인 SCM

유럽이나 기독교의 역사를 모르더라도 십자군은 다 아실 겁니다. 뚜렷한 이미지도 있죠.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 천을 가슴에 걸치고 있는 중세 기사의 모습이죠. 십자군 원정은 11~13세기에 걸쳐 서유럽 그리스도 교도들이 성지 회복이란 명분으로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일으킨 대 원정입니다. 한 번이 아니었고 거의 200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그중 3차 원정군에 우리가 잘 아는 ‘사자심왕(Lion Heart) 리처드 1세’가 있습니다. 리처드의 군대는 특히 용맹했습니다. 그 용맹함의 근거가 엉뚱하게도 갤리선이었습니다.

아코와 아르수프 사이를 왕복수송하는 갤리선단 아르수프 아코 전위 중앙 후위 그리스토교군

"육상 행군에서는 가능한 한 바다와 가까운 길을 택할 것"

이것이 리처드 군의 기본 원칙이었습니다. 지상군과 병행해 선단도 남하하기 때문인데, 이 선단은 군량 보급의 임무와 부상병을 후방으로 실어 나르는 임무를 맡습니다. 이는 리처드가 병참을 중시하는 사령관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병사들에게는 설사 부상을 당하더라도 내버려 두고 가지 않겠다고 확언한 것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였죠. 십자군 전사가 되어 중근동까지 와서 싸우는 그리스도 교도에게 가장 큰 악몽은, 부상을 당해 그대로 적에게 붙잡히는 것이었습니다. 생포되면 비록 죽임을 당하지 않더라도 노예로 팔려갑니다. 이슬람교도 노예가 되면 목과 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광산 노동이나 갤리선 조수로 혹사당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에게 죽임을 당하면 순교자가 될 수 있지만 노예는 순교자가 아니기 때문에 천국의 자리도 예약하지 못합니다. 신앙심 두터운 중세 그리스도 교도에게 이슬람 사회에서 노예로 죽는 것만큼 끔찍한 불행은 없었죠. 리처드는 그런 공포를 없애 주었던 것입니다.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면, 평범한 사람도 응분의 성과를 보이는 법이죠.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는 것이 갤리선으로 대표되는 병참, 즉 SCM이었던 거죠.

유명한 교수님들이 쓰신 책을 찾아보니 SCM의 시작은 전쟁의 ‘병참’이라는 공통된 의견이십니다. 병참은 영어로 ‘Logistics’이고 이 용어는 근래 ‘물류’라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지금은 그 뜻이 엄청나게 넓어졌지만 물류는 원래 논리적이고 합리적 계산을 바탕으로 군대 이동의 숙영을 잘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물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고, 반복되는 전쟁과 원정의 역사 속에서 물류는 발전해 왔습니다. 전시가 아닌 평상시라면 절실히 요구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전쟁터에서는 생사를 가르게 하죠. 그리고 그 전장은 지금 기업들 사이에 있죠.

공급망 십자가

두 개의 선이 직각을 이루며 가로지르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디자인은 2천 년 넘게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 십자가 말고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지만 인류에게 십자가 못지않게 영향을 준 십자가가 또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공급망 십자가’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수요 공급 계획 실적

단언컨대 세상의 모든 공급망과 이를 지원하는 체계나 컴퓨터 시스템은 이 공급망 십자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적인 의미의 십자가보다 인류에게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인류 최초 공급망이었던 가족으로 구성된 ‘밥 공급망’은 수요와 공급이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수요자이자 공급자인 엄마, 아빠가 있고 공급만 받는 아들이 수직선을 구성하죠. 계획과 실적도 큰 예외가 없습니다. 사냥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던 시절에는 하루 세 끼에 가족 수를 곱한 정도가 계획된 수요였고, 밥을 거르는 일이 거의 없었을 테니 계획대로 만들어진 밥을 다 먹어 치웠을 겁니다. 간혹 가족 중 누군가가 아파서 밥을 못 먹으면 음식이 남을 수 있었겠지만, 이것도 배고픈 다른 가족 구성원이 충분히 먹어 치울 수 있었을 터이고, 그게 어려우면 밖에서 배회하는 개가 먹었을 테니까요. 그러다 마을 단위 밥 공급망이 생겼고, 분업도 일부 이뤄졌었죠.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농사만 짓던 마을이 이제 산업화된 도시로 바뀌었고 밥 공급망에서 밥맛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한 가족이 도시락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제는 다양한 일을 하게 되어서 식사를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팔기로 한 겁니다.

이제 수요는 가족만이 아니라 그 도시에서 일하는 배고픈 불특정 다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오늘 몇 명이 도시락을 주문할지 알 수 없습니다. 드디어 십자가 균형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두께가 동일하던 수요와 공급을 잇는 직선에 불균형이 생깁니다. 어떤 날은 수요 부분이 두꺼워집니다. 그런 날을 도시락이 모자라 고객에게 욕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도시락을 좀 넉넉하게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남은 도시락을 버리게 되어서 공장장인 엄마에게 욕을 먹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도시락 가게 운영을 하게 된 아들은 수요와 공급으로 이뤄진 직선에 하나의 선을 더 긋습니다. 계획과 실적의 선이었죠. 가로로 계획과 실적을 잇는 선을 긋고, 이웃한 것들을 연결해 보니 가상이 원이 만들어집니다.

수요 공급 계획 실적 수요계획 수요실적 판매실적 공급계획 공급실적 생산실적

연결점에 두 요소의 관계를 적어보니 수요와 계획 사이는 ‘수요계획’이 되고, 계획과 공급 사이는 ‘공급계획’이 됩니다. 또 수요와 실적이 이어진 곳은 ‘수요실적’이 될 것이고 공급과 실적이 이어진 곳은 ‘공급실적’을 적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요실적은 판매실적입니다. 하지만 수요에 꼭 판매하는 것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죠. 도시락 가게 가족도 점심으로 직접 도시락을 먹으니 수요에 더해져야 하고, 판매를 늘리기 위해 샘플로 제공하는 도시락도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공급실적도, 다른 도시락을 만드는 곳에서 일부 받아서 판매한다면 자체로 생산한 도시락 외에 업체로부터 공급받은 수량도 더해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아들은 잠시 머리가 밝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각 직선의 시작과 끝이 두께가 같고, 두 직선의 두께도 동일하면 완벽한 운영이 이뤄지는 것이죠. 예측한 만큼 도시락 만들 계획을 하고 딱 그만큼만 생산해서 그대로 팔면 고객에게도, 엄마에게도 욕먹을 일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곧 우울해졌습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옛날처럼 가족만을 위해 도시락을 만든다면 수요와 공급은 바로 나옵니다. 엄마, 아빠, 나, 이렇게 3개가 전체 수요량이자 공급량이죠. 그리고 그것이 곧 계획이자 실적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시에서 우리 집 도시락을 점심에 먹고 싶어 하는 불특정 다수가 수요자입니다. 전체 수요량이 상황에 따라 매일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도시락 가게에 마법사가 있으면 수요와 공급을 맞출 수 있습니다. 오늘 전체 수요량을 다 합해보니 1000개예요. 마법사가 바로 확인하고 마법 지팡이를 휘둘러 도시락 1000개를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1000개의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1000개의 도시락을 만들기 위한 식재료를 미리 준비해야 하죠. 식재료가 항상 완벽히 준비되어 있다고 가정해도 1000개의 도시락을 만들어내려면 최소 10여 명의 사람과 몇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계획이 필요해집니다.

이번에는 먼저 몇 개의 도시락이 필요한지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미리 들어온 주문과 예측되는 주문을 합하여 만듭니다. 이것을 수요계획이라 합니다. 수요계획을 짜고 바로 수요실적(판매실적)이 나오지는 않겠죠? 도시락을 배달하고 소모된 도시락 숫자를 집계해야 수요실적이 나오겠죠. 수요가 만들어지고 그 실적이 집계되는 사이의 시간 차는 우리 회사가 어떤 제품을 팔고 있는지와 얼마나 빠르게 실적을 집계할 수 있는 체계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아예 집계를 하지 않을 수도 있죠. 매일 들어오는 돈(매출액)만 집계하고 대략적으로 도시락 판매 가격을 나누어서 판매량 계산해 수요실적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체계를 따르면 정확하지는 않겠죠? 도시락 대금이 매일 그때그때 현금으로만 들어온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잖아요. 그렇다면 한 달에 한 번 대략적으로 판매실적을 집계할 겁니다.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낸 수요계획은 어디에 쓰일까요?

수요계획은 가장 우선적으로 공급계획을 수립하는 데 사용됩니다. 몇 개가 팔릴지에 따라 도시락을 몇 개 만들지를 계획할 테니까요. 혹자는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공급계획을 왜 짜지? 수요가 들어오는 대로 만들어버리면 매출도 늘고 이익도 늘어날 텐데. 맞습니다. 우리가 마법사라면 가능하죠. 문제는 우리가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기, 야채, 소스 등의 식재료와 음식을 만들 요리사, 그리고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 때 필요한 조리기구와 설비들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식자재 준비는 특히 중요하죠. 무한대로 미리 창고에 쌓아 두고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고기나 생선 같은 식자재는 오래 보관할 수가 없죠. 그래서 수요계획이 만들어지면 그 수에 근거해서 공급계획을 짜야 합니다. 돈가스가 당일 메뉴였다면 돼지고기와 돈가스 소스 등이 얼마나 필요하고 어떻게 수급할지 계획을 짜야 합니다. 요리를 할 사람들도 몇 명이 필요한지 계산해서 근무 계획을 짜야 하겠죠. 이것을 공급계획이라 부릅니다. 식자재가 문제없이 입고되고 요리를 할 직원들이 무리 없이 출근해 돈가스를 잘 튀겼다면 계획한 수량을 계획한 시간에 만들어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공급실적 또는 생산실적이라 부릅니다.

이제 최종적으로 도시락 몇 개가 팔렸는지를 확인해 수요실적(판매실적)을 집계하면 한 번의 공급 사이클이 완성됩니다. 판매실적이 중요한 이유는 이 정보가 쌓이면 수요계획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잘 진행된다면 수요에서 계획한 양과 공급한 실적 수량이 동일할 것이고 아래와 같이 가장 이상적인 공급 사이클을 구성하게 되겠죠.

수요 공급 수요계획 -> 공급계획 -> 공급실적 -> 수요실적

고객이 주문을 받아서 수요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식자재와 필요 인력, 설비를 계산하여 공급계획을 수립합니다. 수립된 공급계획에 따라 도시락을 생산한 수량만큼 공급실적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도시락을 고객에게 차질 없이 배달하면 수요실적이 나옵니다. 수요계획량과 공급량이 같기 때문에 수요의 시작점과 공급의 끝점 두께가 동일합니다. 단순화한 그림으로 보면 너무 간단해 보이는 일이지만 이 일들 사이에는 수많은 돌발 상황과 시간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항상 차질이라는 것이 발생하죠.

수요 공급 더 팔 수 있었는데

수요가 공급보다 많은 경우는 도시락을 더 팔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놓친 기회만큼 매출이 줄어들고 이익도 줄어들 겁니다. 그래도 이 경우는 우리가 공급할 수 있는 양을 미리 알아서 수요가 있지만 주문을 받지 않은 상황이죠. 만약 우리 공급능력을 잘 모르고 주문을 다 받아 버렸다면 낭패입니다. 고객들이 주문한 도시락을 받지 못하게 되니까요. 고객 불만은 늘고, 신뢰는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수요계획을 짤 때에는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최대량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공급능력(Capacity, 줄여서 ‘카파’라고도 함)이라고 합니다.

최대공급능력은 우리가 얼마만큼의 자원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도식락에서 중요한 밥을 예를 들어보면 일단 밥을 짓는 취반기와 지어진 밥을 용기에 하나씩 담는 배식기 처리능력이 있을 겁니다. 최대로 몇 개까지 밥을 담아낼 수 있는지가 최대공급능력이 되겠지요. 여기에 밥의 재료인 쌀을 최대 얼마까지 하루에 조달할 수 있는지도 공급능력에 영향을 주고 밥을 짓는 과정을 수행하는 직원의 수도 공급능력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하지만 보통은 취반기나 배식기처럼 능력을 유연하게 바꿀 수 없는 자원에 맞춰 인력이나 식자재의 최대 공급능력을 맞춥니다.

수요 공급 남은 도시락은 어떻게?

반대의 경우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측한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은 경우입니다. 주문을 받았는데 도시락이 모자라 도시락을 배달하지 못하는 것은 큰 사고이기 때문에 수요보다 공급량을 조금 더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주문을 처리하고 남은 도시락은 현장 판매를 하거나 직원 식사로 돌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처리하는 데도 한계가 있죠. 처리 가능한 수량이 넘어가는 도시락은 버려야 합니다. 버리는 것만도 손실인데 음식물 처리에도 돈이 들어가죠. 이래저래 돈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최대한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공급망관리(SCM)가 전쟁 물자 조달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전쟁은 국가 존망이 걸린 죽고 사는 문제였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의 균형보다는 수요를 무조건 충족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반면 기업의 공급망관리(SCM)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생명입니다. 공급망 십자가가 중요하고 제대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출처 : 현장 컨설턴트가 알려주는 공급망 관리(SCM) 성공 전략 (주호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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