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관리를 잘 해내기 위해서는 앞서 살펴본 SCM 프로세스를 잘 설계하고 통제와 유도책까지 잘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말이나 문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시스템으로 만들어지고 변화가 시의적절하게 반영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공급망 전체를 관리하기 위한 SCM 체계를 시스템으로 구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엄청난 기간과 노력, 자원이 필요한 일입니다. 규모가 큰 기업도 부담이 되는 일이지요. 코로나19로 많은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한 후 어째서인지 시스템에 대한 투자는 늘어났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스템을 통한 통제와 유도가 더욱 절실해졌기 때문입니다. 세계화를 통해 기업의 활동 무대는 그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고, 관리해야 할 공급망의 구성원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만큼 통제가 어려워졌고 공급망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도 쉽지 않아졌죠. 사람과 문서를 통한 통제와 유도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발전하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전달 속도였고, 두 번째는 해석의 차이였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이 컴퓨터 시스템입니다.
코로나19 발생 초반인 2020년 2월 말에 처음으로 지역 간 이동을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기 시작했죠. 회사 차원에서는 해외 출장은 금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때 컴퓨터 시스템을 갖춘 회사와 아닌 회사는 속도와 실행의 일관성에서 큰 차이가 났습니다. 제대로 출장 시스템이 갖춰진 회사는 의사결정이 나자마자 시스템에 통제 사항을 적용합니다. 그 시점부터 해외 출장 시스템 접속을 막아 버리면 됩니다. 반면 출장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회사는 의사결정 사항을 임원 회의에서 공지하고 임원은 그 내용을 팀장을 모아 알려줍니다. 다시 팀장은 팀원에게 전파하겠지요. 그 사이에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를 것이고 그 사이에 몇몇 사람은 출장을 떠날 겁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만약 의사결정 내용이 ‘위험 지역에 대한 해외출장 자제’라면, 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위험 지역에 대해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것이고, 전달되는 과정에 왜곡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SCM 체계 전체가 컴퓨터 시스템으로 잘 갖춰져 있다면 공급망 전체의 방향성 있는 속도 전환이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가 심각해져 베트남이 봉쇄된다면, 베트남 공장에서 생산해야 할 스마트폰의 생산량을 맞출 수 없게 됩니다.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면 그때부터 전화와 메일로 차질 수량을 체크하고 해당 물량을 대신 생산할 수 있는 곳을 찾은 다음 생산 준비를 시키고, 원래 실어 보낼 비행 편은 취소하고 새로운 생산지의 비행 편을 수배하는 등 여러 가지 일 처리를 일일이 체크하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사불란하게 착착 진행되면 좋겠지만, 곳곳에서 혼란이 벌어지겠죠. 제시간 안에 정확히 필요한 물량을 생산해 고객에게 보내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일 것이고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비용은 몇 배가 더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일했던 회사에서 SCM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때 빈번하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리고 온갖 혼란 속에 일을 어떻게든 처리한 사람의 능력을 높게 사기도 했지요. 사실은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있었는데 말이죠.
실제로 SCM 체계가 제대로 잡혀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곳에서는 의사결정 사항이 거의 실시간으로 시스템에 적용되고 통제됩니다. 유럽에 큰 화산 폭발이 일어난 적이 있어요. 그 여파로 유럽 전역에 중국에서 만든 스마트폰을 항공기로 보낼 수 없게 되었는데, 그때 잘 짜인 SCM 체계의 힘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습니다. 유럽으로 실어 보낼 물량에 대한 생산 계획이 화산 폭발이 일어난 이후 몇 시간 만에 중국에서 취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스템을 통해 육로로 운송할 수 있는 생산법인에 생산 계획이 내려갔고, 가용한 재고도 바로 확인해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일이 하루 안에 처리되었습니다.
(A) “너무 비싼 거 아닌가요? 일단 반으로 줄여 보세요.”
(A) “당신 돈이면 그렇게 하겠어요?”
(B) “그걸 왜 당신이 고민합니까? 룰대로, 예산에 근거해서 처리하세요.”
(B) “그게 당신 돈입니까?”
두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근무하는 회사는 (A)와 (B) 중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판단이 어렵다면 (A)와 (B) 중에 어떤 회사가 더 바람직할까요? 혹은 어느 쪽이 회사를 위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른 최적해는 있죠.
제가 갓 입사했을 때 대한민국 대부분의 기업은 세계에서 3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약 10년 남짓 한 시간에 제가 속한 기업의 일부는 글로벌 기업 수준으로 올라섰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삼류에서 일류로 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을 압축하여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입사 초기에, 정답은 (A) 유형에 가까웠습니다. 회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직원은 회사 돈과 물건을 마치 자기 물건처럼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하면 수시로, “당신 돈이면 그렇게 하겠어요?”라는 질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회사 생활이 조금은 익숙해져 가던 과장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1류에 거의 근접하고 있던 회사에 벤치마킹을 갔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투자 문제로 넘어갔을 때, 그쪽 임원 한 분이 안정성을 위해 이중화도 아니고 삼중화하는 것이 좋다며 투자 규모를 소개했습니다. 제가 지원하던 회사는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아서 투자에 민감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였던지 같이 갔던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때 상대편 임원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그걸 왜 당신이 고민하죠? 당신 돈 아니잖아요?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면밀하게 검토하고 예산에 따라 집행하면 되는 거지요.”
그 순간은 충격이었습니다. 임원까지 된 분이 어쩌면 저렇게 무책임할 수 있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죠. 그때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점점 회사가 글로벌 일류 회사로 향하면서 바뀌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실 지금도 제가 속한 조직에서는 (A)와 (B) 유형이 혼재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A) 유형인 조직이 (B) 유형인 조직에 비해 성과가 좋지 않습니다. 조금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1등 DNA’를 가진 조직은 거의 대부분 (B) 유형을 따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회사를 내 것이라 생각하고 일하는 것을 직장인의 최고선이라 배우지 않았던가요? 솔직히 저 자신도 여기에 확신을 가지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회사 생활 중에 몇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조금씩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개그 소재로 로비스트가 등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개그맨이 연기한 로비스트는 견적을 받으면 보지도 않고 50%를 깎으라 말합니다. 그럼 상대는 어떻게 할까요? 처음에는 가격을 150%로 부르겠죠.
회사 돈을 내 돈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가격을 최우선으로 봤습니다. 반면, 회사 돈은 내 돈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스펙(Specification)을 봤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니 전문성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게 되죠. 내 돈이라 생각하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고민이 길어지면 속도가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모든 조직, 모든 회사가 (B) 유형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규모가 크지 않다면 회사 돈을 내 돈처럼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B) 유형을 따르면 부정의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규모와 덩치는 커졌는데 아직도 이전 방식 그대로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 회사들입니다.
규모가 커지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규칙이 필요해집니다. 이때 통제와 유도가 필요합니다. 통제에 너무 의지하면 속도가 떨어집니다. 통제는 기본적으로 처벌을 전제합니다.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떤 원칙이 정해지고 전해지는 동안 사람들은 기다려야 합니다. 반대로 유도에만 의지하면 예외가 많아집니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컴퓨터 시스템입니다. 물론 프로세스는 정해야 하지만 룰을 숙지하는 시간, 전파 시간을 줄이거나 없애 줍니다. 기술이 좋아지면서 사람이라면 세세하게 똑같이 적용하지 못할 것을 기계는 할 수 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 백 가지의 특화된 프로세스가 있어도 명확하게 정의되고 그것이 컴퓨터 시스템에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다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출처 : 현장 컨설턴트가 알려주는 공급망 관리(SCM) 성공 전략 (주호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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